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뉴델리 밀회 조작사건 (문단 편집) == 전개 == 이 사실은 한국을 발칵 뒤집어 놓았다. 신익희와 민국당은 그런 사실이 없다며 적극 부인했고 내무장관 [[백한성]]이 함상훈을 불러 누가 신익희의 그런 일을 제보했는지에 대해 물었으나 함상훈은 제대로 대답하지 못했다. 국회 차원에서도 진상조사를 벌였으나 신익희가 뉴델리에서 조소앙을 만났다는 증거를 찾지 못했고 결국 사실 무근으로 판명되자 민국당은 함상훈을 제명조치하는 것으로 사건을 마무리했다. 그러나 사건의 여파는 대단한 것이었는데 [[자유당]]은 소위 '''제3세력'''에 대한 공포를 국민들에게 불어넣으면서 이를 대대적으로 선전했다. 자유당내 이승만에 비판적이던 비주류들이 민국당과 연대하는 것을 끊고 이승만의 영구집권을 획책하기 위해 1953년 11월 '''국가의 안전에 관한 중대사항은 국민투표로서 결정한다''' 는 조항과 함께 "중립화반대협상배격결의안"을 통과시킨 데 이어 개헌을 추진했다. 그렇게 해서 나온 헌법이 그 유명한 [[사사오입 개헌]]이다. 일련의 정황으로 볼 때 이 사건은 자유당 세력이 야권을 궁지로 몰고 이승만의 영구집권을 위한 개헌작업을 추진하기 위해 조작했을 가능성이 크다. 사건 조작의 주체는 오늘날까지 밝혀지지 않았지만 [[국군기무사령부|특무대]]장 [[김창룡(군인)|김창룡]]이 유력한 배후로 거론되고 있다. 그러나 분명한 증거는 없다. 다만 김창룡이 민국당의 계파 갈등을 활용해서 사건을 조작했을 것이라는 추측은 있긴 하다. 1960년 혁신계 정치인인 [[고정훈]]은 이게 김창룡의 음모라고 최초로 주장하였으나 [[http://dna.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60072700209103001&edtNo=2&printCount=1&publishDate=1960-07-27&officeId=00020&pageNo=3&printNo=11800&publishType=00010|핵심 없이 폭로만 되풀이했다.]] 그래서 [[http://dna.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60072700209103013&edtNo=2&printCount=1&publishDate=1960-07-27&officeId=00020&pageNo=3&printNo=11800&publishType=00010|재판장에게 몇 번이나 핀잔]]받았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